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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 문화삼매경

[뮤지컬/동숭아트홀] 쥬크박스 뮤지컬계의 신동 '스트릿 라이프'

 

 

 

 

 

 

 

 

 

 

[뮤지컬] 스트릿 라이프 / 동숭아트센터 동숭홀

 

 

 

지금으로부터 십여년 전, 명절 날 친척 집 사촌 오빠 방에 엎드려 지구 색연필로 밀린 일기를 쓰고 있을때 쯤
방에 들어온 오빠가 내게 가수 중에 누굴 좋아하냐고 물었던 기억이 난다.
내 기억이 맞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당시에는 H.O.T와 젝키의 뒤를 이어 국민 아이돌이 된 god가

굶주릴 거 다 굶주린(?) 후 전성기를 맞았던 시기였고 조성모가 마성의 '아시나요' 로 각종

상이란 상은 다 휩쓸고 다녔으며, 내가 흥미롭게 지켜보던 댄싱머신 스티브유씨가 촺길봐뤠 하

격한 춤을 추며 손가락을 몹시 흔들어대던 그 시절.

 

"글쎄 나 라디오헤드?"

"라디오 헤드가 누구야. 아니 외국가수 그런거 말고 우리나라 가수."
"음, 근데 나 아빠 LP로 들었는데 오빠도 혹시 콜드플레이 알아?"
"콜드플레이가 누구야?"

 

(....... 그래 분명히 그 시절부터 대화가 잘 안 통했다.)

 

약간의 실갱이 끝에 결국 DJ DOC가 좋다고 한 기억이 나는데 (내 기억에 아마 그때까지 DJ덕이라고 불렸던 디오씨)
그 말을 듣자마자 오빠가 미간을 찌푸리며 아리송한 표정으로 말했다.

너 그런 애들 좋아하지마라. 아직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나쁜 노래하고 막 나가는 양아치들이야.
미안. 이미 L.I.E와 포조리가 들어있던 해적판 테이프는 아빠 몰래 구해서 비닐이 늘어지도록 들었다.

 

1994년 데뷔해서 20년 가까이 대중을 무장해제시키고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에 선정 될 만큼

최고의 인기를 누렸지만 툭하면 불거지는 잦은 사건사고로 경찰서와 법원에 들락거리며 활동과 자숙을

반복하던 가요계의 문제아들.

이 나이 먹을대로 먹은 악동들이 작년, 자신들의 노래를 엮어 중대형 뮤지컬을 기획하는 '사고'를 쳤다.

 

스물 두 곡의 히트곡을 절묘하게 편곡해 하나의 스토리 라인에 녹인 뮤지컬 <스트릿 라이프>는

전 연령층이 함께 따라 부르고 즐길 수 있는 음악들을 선정해 파워풀한 퍼포먼스와 가창력으로 내 눈을 사로잡았다.

동숭아트홀에 다녀온지 벌써 1년이 훌쩍 지났는데, 문학성 예술성 규모 다 떠나서 제일 재밌게 봤던 뮤지컬 중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다. 처음 DJ DOC의 노래만으로 된 뮤지컬이 나왔다는 걸 알았을때
진짜 하다하다 별게 다 뮤지컬로 나오는구나 싶었다.


가장 크게 성공한 쥬크박스 뮤지컬인 맘마미아는, 세계적 인지도를 가진 ABBA라는 대형그룹의 노래로 꽉 채워져
호평을 받았는데. 히트곡 열 몇곡 겨우 떠오르는 국내 힙합그룹의 노래로 뮤지컬이라니 하며 티켓이 아까워

가볍게 보러 갔는데.
아,..... 손들고 반성했다. 정말 신선한 충격.

 

최근에는 뮤지컬을 보는 관객들의 수준이 높아지다보니  창작 뮤지컥들은 흔히 너무 많은 내용을 담으려고

하는 오류를 범한다. 관객의 다양한 취향을 만족시키기 위해 (혹은 품위 유지를 위해)
스토리는 점점 복잡해지고 음악은 어려워지고, 대사는 심오해지고.
결국 연출은 산으로 가고 극은 사생작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허다한데 <스트릿 라이프>는 그 오류를

똑똑하게 부숴버리는 통쾌함을 보여준다.

관람하는 내내 생성된 엔돌핀이 몸안 구석구석 축적되어 엄청난 면역력 증가를 시켜 줄 것만 같은

우스운 생각이 들 정도로.

극은 시종일관 단 한가지 모토, '제대로 한 번 놀아보자'를 끝까지 유지한다.

이 현명한 연출력은 폭발적인 가창력을 가진 젊은 배우들의 열정과 파워 덕에 더욱 빛을 발하는데,

주연배우들 뿐 아니라 앙상블까지 흠잡을 데가 없다.
커튼콜 스텐딩까지 그 에너지에 소리지르며 답례하는 관객들을 위해 모든 배우들이 핏대 올리며

노래하고 몸이 부서지도록 멋지게 춤을 춘다.

 

여담이지만, 공연은(특히 음악이 나오는 공연은) 연출진과 출연진이 일방적으로 관객에게 전달하는

단방향 커뮤니케이션이 아니라 관객과 함께 주고 받는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이다. 
출연자의 무대 매너를 따지듯 관람자에게도 적절한 관람 매너가 필요한데,
누군가와 대화를 할 때 단지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하게 들어주어야 할 때가 있고

박수를 치며 맞장구를 쳐주어야 할 때가 있 듯, 극의 막이 내릴 때만 박수를 쳐야 멋진 공연이 있고

몸을 부딪치며 정신 놓고 즐길 때 멋진 공연이 있다.
<스트릿 라이프> 출연진과 관객들은 누군가 유도하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럽게 함께 호흡하며

각자가 선 자리에서 놀아재낀다.

 

관객들은 주인공 '스트릿 라이프' 의 팬클럽 회원이 되어 '완소수창'을 자연스레 외치기도 하고 삐걱삐걱에

울컥했다가 욕 아닌 욕 "이런 개나리 십장생"을 목이 터져라 같이 외치게 되는 희한한 현상이!

 

무엇보다, 주연 배우들이 모두 랩을 하는데, 무대를 끊임없이 숨차게 누비면서도

나 예전에 뒷골목 어디서 랩 좀 하다 왔지 하는 포스를 내뿜으며  탁월한 가사 전달력으로 랩을 너무나 잘 했던 기억이 난다.

 

일부 대사들은 DJ DOC의 음악들을 대변하듯 속이 시원할 정도로 직설적인데, 미디어에서 청소년 보호가 어쩌구 하며

규제하고 편집하는 왠만한 욕을 모아 주인공들을 못살게 구는 세상에게 적나라하게 대신 뱉어준다.
갑자기 수창이 대사중에 "존~나 돈 쌔빌 궁리나 하세요" 했던 게 생각나네. (참고로 관람 연령 7세부터^^^^^^)

 

2막 클라이막스에서는 주인공 재민이, 돌아가신 어머니를 위해 가시는 길 만큼은 즐겁게 해드리자며 역설적이게도

"삐걱삐걱" 을 절규하며 부르는데, 원래 저 노래가 엄청나게 애절하고 슬픈 노래였던 것 처럼 들릴 정도로 편곡을 잘 했다.

DJ DOC의 원곡을 많이 헤치지 않으면서도 음반으로 들을 때 다 전달되지 못했던 가사들이 그들에 의해 아주 콱 박혀
진중하게 들린다. 뮤지컬 <스트릿 라이프>가 가벼워지지 않을 수 있는 이유.

 

DOC 노래가 이렇게 좋을 줄 몰랐어. 승필언니와 동숭아트홀을 나오면서 동시에 외쳤던 말이다. 이게 바로 쥬크박스 뮤지컬이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가 아닐까 싶다. (그 후로 몇주 동안 노래방만 가면 DJ DOC노래를 메들리로 부름)
최근에는 일본 오사카에서 <런투유>라는 제목으로 재공연하고 있다고 하는데
한국에서 다시 한다면 저금통 깨서 다시 예매하고야 말겠다!!!!!

오랜만에, 놓치면 후회 했을 거라고 생각한 신선한 공연이였다.